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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1. 2013.03.19 이성복 시집 - 「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」


12. <잔치 국수 하나 해주세요>



허나 사랑이란 피곤해지면 잠자야 하는 것

또 굶주리면 먹어야 하는 것

― 에밀리 디킨슨, 「사랑이란 죽은 이도」


 내가 담장 너머로 '복분식 아줌마, 잔치 국수 하나 해주세요' 그러면 '삼십 분 있다가 와요' 하기도 하고 '오늘 바빠서 안 돼요' 하기도 하고, 그러면 나는 할매집 도시락을 시켜 먹거나, 횡단보도 두 번 건너 불교회관 옆 밀밭 식당에 아구탕 먹으러 간다. 내 식욕과 복분식 아줌마 일손이 일치하지 않을 때, 재빨리 내 식욕을 바꾸는 것이다. 아니 식욕을 바꾼다기보다, 벌써 다른 식욕이 찾아오는 것이다. 내가 알던 여자들도 대개는 그렇게 왔다. 하루 이틀 지나면 그때는, 무얼 먹고 싶었는지 생각도 안 나는 세월에서.






15. <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>



달에는 물로 된 돌이 있는가?

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?

― 파블로 네루다, 「유성」


 불 끄고 자리에 누우면 달은 머리맡에 있다. 깊은 밤 하늘 호수에는 물이 없고, 엎드려 자다가 고개 든 아이처럼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 자국. 노를 저을 수 없는 달의 수심 없는 호수를 미끄러져 가고, 불러 세울 수 없는 달의 배를 탈 것도 아닌데 나는 잠들기가 무섭다.

 유난히 달 밝은 밤이면 내 딸은 나보고 달보기라 한다.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, 별 성 자 별보기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. 그럼 나는 그애보고 메뚜기라 한다. 기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걸치면, 영락없이 아파트 12층에 날아든 눈 큰 메뚜기다. 그러면 호호부인은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. 벼랑의 붉은 꽃 꺾어 달라던 수로부인보다 내 아내 못할 것 없지만, 내게는 고삐 놓아줄 암소가 없다.

 우리는 이렇게 산다.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, 절해고도의 섬처럼,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, 절해처럼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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